유럽 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공통으로 경험하는 것 중 하나는 도시 전역에 깔린 돌길이다. 이 길은 단지 보행자 도로나 광장만 아니라 차량이 통행하는 도로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과 말, 그리고 자동차가 오간 이 돌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매끄럽고 세련된 질감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 도시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행자의 입장에서 이 돌길은 마냥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울퉁불퉁한 표면은 걷는 이를 쉽게 피로하게 만들고, 여행용 가방을 끌 때는 큰 소음을 유발한다. 또한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승차감도 떨어지고, 타이어의 마모도 빠르다. 도로 유지 비용 또한 아스팔트에 비해 높은 편이다. 그런데도 유럽의 많은 도시들은 여전히 이 돌길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은 왜 이토록 불편한 돌길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1. 로마에서 시작된 길의 역사
유럽 돌길의 기원은 고대 로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은 제국의 확장과 함께 체계적인 도로망을 구축하였으며, 초기에는 소금을 운반하기 위한 '소금길(Via Salaria)'이 그 시작이었다. 기원전 4세기경, 로마는 군사적 이동과 보급품 수송을 위해 도로를 본격적으로 정비하며 길 위에 견고한 돌을 깔기 시작했다. 이처럼 포장된 도로는 로마 제국 전역에 30만 km에 달하는 규모로 뻗어 있었으며, 주요 교차점에는 오늘날의 파리, 런던, 쾰른과 같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돌길은 단순한 통행로를 넘어 로마가 세계 최초로 길을 사회 인프라로 활용한 예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국의 쇠퇴와 함께 도로망도 점차 붕괴되었다. 5세기 이후 중세 유럽은 장원경제 체제로 전환되며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되었고, 오히려 도로는 외세의 침입 경로로 간주되어 일부러 제거되기도 했다. 그 결과, 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지역은 숲으로 덮여 이동이 극히 제한된 공간이 되었다. 이 시기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헨젤과 그레텔’과 같은 숲의 공포를 다룬 동화가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돌길의 재등장: 아스팔트를 이긴 전통
19세기에 들어서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아스팔트 도로가 도입되었고, 이는 한동안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많은 도시가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다시 돌길을 복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오래된 건물들이 밀집한 구시가지나 중심 광장에서는 돌길이 지닌 역사성과 기능성이 더욱 주목받았다.
3. 돌길의 기능적 장점
돌길은 단지 전통의 상징만이 아니다. 실질적인 기능 면에서도 많은 장점을 지닌다. 첫째, 진동을 흡수하고 분산시키는 성질이 있다. 이는 철로에 자갈을 깔아 진동을 줄이는 원리와 유사하다. 아스팔트 도로는 차량의 진동을 그대로 인접 건물에 전달하는 반면, 돌길은 진동을 분산시켜 미세한 균열로부터 오래된 건축물을 보호할 수 있다. 유럽의 도시들이 돌길을 유지하는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진동 문제에 있다.
둘째, 돌길은 도시의 미적 가치를 높인다. 돌의 질감과 무늬,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깃든 표면은 유럽 도시의 역사성과 조화를 이루며 도시 경관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부 유럽 도시들이 재건 과정에서 아스팔트를 깔았을 때, 시민들과 예술계로부터 거센 비판이 일었던 것도 이러한 감성적 이유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다양한 문양과 디자인이 적용된 돌길이 관광객을 유치하는 주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셋째, 돌길은 보행자의 안전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한다. 불규칙한 표면은 차량의 과속을 자연스럽게 억제하며, 차량 주행 시 발생하는 소음은 보행자의 경각심을 유발하여 사고 가능성을 줄여준다. 또한 돌은 교체가 간편하고 내구성이 뛰어나 유지보수가 용이하다. 빗물이 틈새를 통해 빠르게 빠져나가 침수 위험도 적다. 아스팔트 도로와 달리 물이 고이지 않기 때문에 장마철에도 안정적인 보행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4. 돌길의 지속 가능한 가치
오늘날 도시 인프라는 효율성과 편의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 스마트 교통 체계, 저소음 도로 포장재 등 기술의 진보는 도시의 물리적 구조에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유럽의 많은 도시는 여전히 돌길을 유지하거나 되살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는 단지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태도가 아니라, 돌길이 지닌 지속 가능한 가치에 대한 합리적 선택에 가깝다.
돌길은 일반적으로 시멘트나 아스팔트보다 훨씬 긴 수명을 가진다. 적절히 관리된 돌길은 수십 년, 심지어 수백 년 동안 기능을 유지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 손상되더라도 전체를 뜯어내지 않고 해당 블록만 교체하면 되기 때문에 유지·보수 비용도 장기적으로 낮다. 이는 단기적인 공사 비용은 다소 많이 들더라도, 전체 생애 주기 비용(LCC: Life Cycle Cost) 관점에서는 매우 경제적이라는 뜻이다.
또한 돌길은 천연 자재로 구성되기 때문에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우수하다. 제조 과정에서 에너지 소비가 적고, 유해한 화학물질이 거의 포함되지 않으며, 재사용이나 재배치도 가능하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는 오래된 돌을 걷어낸 후에도 이를 폐기하지 않고, 다른 지역의 보행로 또는 소규모 광장에 재활용하는 사례가 많다. 이는 순환 경제(circular economy)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 보존의 측면에서도 돌길은 중요한 상징물이다. 현대 도시가 획일화되는 흐름 속에서, 돌길은 각 도시의 고유한 풍경과 역사성을 지켜주는 매개체가 된다. 이는 관광객 유치뿐 아니라 지역 주민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으며, 최근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서 돌길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돌길은 단지 오래된 방식의 도로포장이 아니라, 환경적 지속 가능성, 경제적 효율성, 문화적 정체성 보존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현대 도시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도시들은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여전히 돌길을 선택하고, 후대에까지 그 가치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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