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탄, '행복의 나라'라는 역설
면적은 한국의 절반, 인구는 고작 80만 명 남짓. 히말라야 깊숙이 자리한 이 작은 나라는 한때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분류되었으나, 오늘날 ‘행복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물질적 풍요가 곧 삶의 질을 보장한다고 믿어온 현대 사회의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엎는 나라, 부탄. 그들의 독특한 국가 운영 방식은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온 우리에게 낯설고도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무엇이 부탄을 '행복의 국가'로 만들었을까?
2. 불안정 속의 선택 - 부탄의 역사와 자립 노력
부탄은 북쪽으로는 중국, 남쪽으로는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외부 위협에 늘 노출되어 있는 지정학적 조건을 안고 있다. 실제로 부탄과 지리적, 문화적으로 유사한 시킴 왕국은 1975년 인도에 흡수되었다. 이러한 운명을 피하고자 부탄은 1970년대부터 점진적인 문호 개방 정책을 추진했으며,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누구도 이 나라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6년, 미국의 경제 전문지 '비즈니스위크'는 부탄 국민이 아시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기사를 통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이어 2010년, 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이 발표한 ‘행복도 지수’에서 부탄은 전 세계 1위에 오르며 ‘행복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3. 왕들의 결단과 GNH 정책을 통해 왕권에서 국민 중심으로
부탄이 ‘행복한 나라’로 불리게 된 데에는 국가 지도자의 철학과 결단이 큰 몫을 했다. 부탄은 1907년 통일 왕국이 수립된 이후 왕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제 국가였다. 그러나 3대 왕은 국민을 위해 자발적으로 토지 개혁을 단행했다. 왕실 소유의 토지조차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였고, 이는 부탄 사회에 안정된 경제 기반과 민주주의적 질서를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뒤를 이은 4대 왕은 더 큰 결단을 내린다. 그는 스스로 절대 권력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선언했으며, 국민이 반발하자 "왕이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나라가 위험해진다"는 소신으로 그들을 설득했다. 이와 함께 도입된 것이 바로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ness) 개념이다. 이는 물질적 성장 대신 국민의 정신적·사회적 행복을 우선시하는 정책 철학으로, 오늘날 부탄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가 되었다.
현 5대 국왕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 이후, 선대의 철학을 보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구현해 왔다. 그는 취임사에서 “군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밝히고, 실제로 코로나19 시기에는 백신을 수송하기 위해 왕실 헬리콥터를 제공하는 등 국민 삶의 최전선에 직접 나섰다. 그는 ‘행복 위원회’를 조직해, 국민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은 도입조차 되지 못하도록 제도화하였다.
또한 그는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국민 설문조사를 통해 정책 방향을 조정했다. 조사 항목은 노동 시간, 수면, 주거, 인간관계, 정신 건강 등 실로 광범위했고, 이는 행정 전반에 국민의 체감형 지표를 반영하는 첫 시도였다.
4. 성장과 균열 - 경제 발전이 남긴 그림자
부탄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소득 51달러, 평균 수명 38세라는 최빈국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이후 국제 원조와 자체 노력, 히말라야 수력 자원의 수출 등으로 경제는 점차 성장해 오늘날 국민소득은 약 3천 달러에 이르고 평균 수명도 69세로 늘어났다. 고등학교까지의 무상 의무교육이 실현되었으며, 정권 교체도 국민의 투표를 통해 이뤄지는 완전한 입헌군주제로 발전했다.
하지만 경제성장은 새로운 사회문제를 동반했다. 급격한 도시화는 소득 불균형을 확대했고, 높은 교육 수준에 비해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해진 청년층의 불만도 증가하고 있다. 핸드폰과 인터넷의 보급은 국제 사회의 물질적 번영과 자국 현실의 격차를 여실히 드러냈고, 이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결국 2016년 신경제재단의 행복도 조사에서 부탄은 2010년 1위에서 56위로 떨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경제 성장률이 오를수록 국민의 행복 체감도는 오히려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탄이 지속 가능하고 균형 잡힌 발전이라는 난제를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부탄은 지금도 완벽한 나라는 아니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부족하고, 도시 빈곤, 청년 실업, 교육과 현실의 괴리 등의 문제는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 나라는 국민의 행복을 중심에 둔 정책 실험을 정직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GNH라는 개념은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라, 실제 정책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고, 국가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철학이자 제도이다.
부탄의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행복하다’는 사고에 익숙하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나라는 1950년대 부탄과 비슷한 수준의 국민소득을 기록했으나, 오늘날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행복도 지표에서는 중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 성장이 국민 삶의 질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부탄은 작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진정한 발전이란 단지 경제 지표를 넘어서, 국민 개개인의 삶과 감정, 관계, 시간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과 행복의 균형.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고민해야 할 과제일지도 모른다.
'세상 이모저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국 음식은 왜 맛이 없다고 여겨지는가 (0) | 2025.05.18 |
---|---|
흑인과 스포츠: 신체적 능력과 사회적 조건의 교차 (1) | 2025.05.18 |
중국과 인도, 인구 대국의 비밀 (2) | 2025.05.17 |
명품의 본질, 가격을 넘어선 가치 (0) | 2025.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