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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모저모

일본이 제약 대국인 이유

by 밍떡자 2025. 5. 30.

1. 일본 약국의 부상

일본은 흔히 ‘편의점 왕국’이라 불린다. 실제로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약 5만 8천 개에 달하는 편의점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그 명칭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본에서는 이 편의점조차 능가하는 존재가 등장하고 있다. 바로 ‘약국’이다.

2023년 기준, 일본 전역에서 운영 중인 약국의 수는 약 6만 여개에 달한다. 이는 단순한 통계를 넘어선 현상이다. 도심은 물론이고, 작은 마을 외곽의 한적한 길가에서도 초대형 약국을 쉽게 마주할 수 있으며, 그 규모는 종종 제약회사 본사와 착각될 정도이다. 인구 대비 약국 수로 따져보면, 일본은 프랑스와 함께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약국은 왜 이렇게 많아졌으며, 또 왜 점점 대형화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일본 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정책적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초고령 사회와 약국의 역할 변화

일본 약국의 확산과 대형화 현상의 가장 중요한 배경은 노년 인구의 급증이다. 일본은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된 국가 중 하나로, 2023년 기준 전체 인구의 28% 이상이 65세 이상 고령자이며, 특히 80세 이상 인구 비율은 사상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 참고로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에 근접하고 있으며, 80세 이상은 약 4.5%에 불과하다.

일본의 고령화는 일찍이 시작되었다. 1997년, 65세 이상 인구가 14세 이하 인구를 초월하는 이른바 ‘노령화 지수 역전’이 발생한 이후, 일본 사회는 빠르게 고령화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의료비와 연금 등 사회보장 비용이 급증하면서,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이 가해졌다. 현재 일본의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250%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의료비 절감과 복지 효율화의 돌파구로 ‘약국의 다기능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단순한 약 판매를 넘어, 약국이 지역사회 건강 관리의 거점으로 진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3. 의약분업과 셀프 메디케이션 센터의 등장

일본은 한국보다 5년 앞선 1995년에 의약분업 제도를 도입하였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이 제도는 약의 오남용을 방지하고 의료비를 절감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는 의약분업을 의무가 아닌 병원의 자율에 맡기면서 제도의 초기 정착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민 의료비가 500조 엔을 초과할 것이란 예측이 등장하면서, 정부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약국의 역할을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셀프 메디케이션 센터(Self-Medication Center)’라는 개념이다.

약국은 단순한 의약품 판매처를 넘어, 주민 개개인이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1차 건강관리 기관으로 변모하였다. 일본의 약국은 혈액 채취, 체지방 검사, 골밀도 검사, 치매 간이검사 등 기본적인 건강검진을 수행하며, 지역 주민들의 ‘담당 주치약사’ 역할을 맡는다. 이와 함께 ‘약 수첩’을 통해 복약 이력을 관리하며, 이는 일본인의 약 80%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약국에는 영양 관리사가 상주해 있어 만성질환 환자에게 식이요법을 조언하는 등 의료와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병원 진료와 처방을 받기까지 긴 대기시간이 발생하는 일본의 의료 시스템 내에서, 이러한 약국의 실용성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4. 생활 밀착형 드럭스토어의 등장

일본 약국의 또 다른 특징은 ‘드럭스토어’로 불리는 형태의 급속한 확산이다. 일본의 약국은 더 이상 약만 파는 장소가 아니다. 초기에는 건강기능식품, 보청기, 지팡이, 기저귀, 마스크 등 건강 관련 상품을 병행 판매했으나, 지금은 생활용품, 식품, 심지어 애완동물 용품까지 판매하는 생활 밀착형 복합 매장으로 진화하였다.

도시 외곽에는 600평을 초과하는 초대형 매장이 들어서며, 도심지에서는 건물 전체가 드럭스토어로 운영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돈키호테’가 있다.

드럭스토어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가격 경쟁력이다. 약은 마진이 높은 품목이며, 드럭스토어는 이를 통해 확보한 수익으로 다른 생활품의 가격을 낮추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로 인해 의약품은 세일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그 외 대부분의 품목은 대형마트보다도 저렴하게 판매된다. 특히 일부 드럭스토어는 24시간 영업체계를 갖추며 편의점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드럭스토어는 정식 약사가 아닌 등록 판매사를 고용함으로써 인건비를 절감하고, 보다 유연한 운영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5. 제약 강국 일본, 세계를 겨냥하다

일본은 오랫동안 세계적인 제약 강국으로 자리매김해왔다. 한때 전 세계 의약품 시장의 20%를 점유하며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시장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현재는 바이오 의약품의 부상으로 시장 점유율이 다소 감소하였으나, 여전히 세계 3위의 제약 대국으로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제약 산업의 기반은 탄탄한 기초과학 역량에 있다. 일본은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분야에서 총 2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본 의약품은 해외 여행객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린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들은 파스, 진통제, 소화제 등 ‘일본 약’을 여행 필수품처럼 구매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 관광객에 비하면 다소 소규모 소비에 불과하다.

2016년, 일본 정부는 의약품을 면세 품목으로 지정하는 법 개정을 단행했다. 이 조치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폭풍 쇼핑’을 촉진시켰고, 결과적으로 일부 감기약이 품절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제적 수요에 힘입어,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반 의약품과 화장품 위주의 드럭스토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일본 약국의 대형화와 다기능화는 단순한 유통 산업의 변화가 아니다. 이는 초고령 사회, 고도화된 제약 산업, 재정 압박 하의 국가 정책, 그리고 일상의 편의성을 중시하는 일본인의 생활문화가 맞물려 탄생한 종합적 결과이다.

이제 일본에서 약국은 단지 약을 파는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건강을 관리하는 플랫폼이자, 일상을 함께하는 생활 공간이며, 나아가 하나의 사회 인프라이다. 일본 사회가 선택한 이 ‘약국 중심 모델’은 앞으로 고령화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많은 국가들에게 하나의 참고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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