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인당 국민소득과 국민 체감 현실의 괴리
2020년대 들어 대만은 눈에 띄는 경제 성과를 거두었다. TSMC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산업은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애플의 주요 협력사인 폭스콘 또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성과는 국가 경제 지표에도 반영되었다. 2022년 대만은 일시적으로 1인당 국민소득(GNI)에서 한국을 앞지르는 기록을 세웠고, 이후 다시 격차가 좁혀지기는 했지만, 현재 양국의 경제 수준은 통계상으로는 유사하다.
그러나 통계상의 숫자와 국민이 체감하는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특히 임금 수준에서 그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만의 평균 월급은 한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며, 심지어 1인당 GDP가 대만의 3분의 1에 불과한 중국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숙련 노동자의 경우 오히려 중국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경우도 있다. 대만 경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성장을 이루고 있는가?
2. 산업 구조의 한계: OEM과 ODM의 그늘
대만 임금이 낮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산업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만 경제는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또는 ODM(자체 설계 생산) 중심의 산업 구조를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특히 대만은 OEM보다 한 단계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ODM 중심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TSMC, 폭스콘 등 글로벌 위탁 생산 기업의 존재로 대표된다.
그러나 OEM과 ODM은 공통으로 ‘브랜드파워’와 ‘가격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가령, 삼성전자나 LG전자, 현대자동차 등과 같이 자체 브랜드로 세계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들은 가격을 결정하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반면, 대만의 폭스콘은 아이폰을 제조하면서도 자사 브랜드를 내걸지 못하며, 계약 금액 이외의 이익을 얻기 어렵다. 이로 인해 원청기업의 원가 절감 요구는 하청업체의 수익을 지속해서 압박하고, 이는 임금 상승 여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같은 구조적 한계는 대만 경제가 세계적 수출 규모를 자랑하지만, 국민들의 임금이 지속해서 정체되는 원인 중 하나다.
3. 경쟁 심화와 중국 변수
대만의 산업 구조는 또 다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과잉 경쟁이다. 대만에는 유사한 사업 모델을 가진 중소 제조업체가 지나치게 많고, 이들은 한정된 글로벌 하청 계약을 따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쉬운 전략은 비용 절감이며, 그중 가장 직접적인 방식은 인건비 절감이다. 즉, 낮은 임금이 생존 전략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
여기에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대만 기업들은 한층 더 심각한 경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저임금의 중국 노동력과 대규모 생산능력을 갖춘 기업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대만의 중소기업 다수는 도산하거나, 생산 기반을 아예 중국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산업의 해외 이전이 대만 내 일자리 감소와 내수 시장의 위축으로 직결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만 정부는 남아 있는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물가를 통제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임금도 함께 억제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물가와 임금이 동시에 정체되는 ‘저성장·저임금’의 악순환이 이 시기 고착되었다.
4. 정부 정책의 실책: 22K의 부작용
대만 정부는 청년 실업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9년 ‘22K 정책’을 도입했다. 이는 대학 졸업생을 인턴으로 고용할 경우 기업에 22,000 대만 달러를 지원하는 제도였다. 당시 환율 기준으로 약 88만 원 수준이며, 한국의 ‘88만 원 세대’와도 유사한 금액이다.
이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일정 부분 고용 창출에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졸업생 초임을 구조적으로 낮추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많은 기업이 이 제도를 악용해 대졸자의 초봉을 22K 수준에 고정했고, 이는 첫 임금이 향후 임금 상승에도 영향을 미치는 대만 고용 시장의 특성상, 청년층의 저임금 고착화로 이어졌다.
5. 주거난과 청년의 절망
낮은 임금 구조는 곧 주거난으로 이어진다.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는 서울에 비견될 만큼 높은 집값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은 서울의 강남보다도 더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평균 대졸 초임은 약 150만 원에 불과하며, 대기업 중간 관리자조차 월급이 250만 원 수준에 그친다.
그 결과 나타난 주거 형태가 바로 ‘타오팡(套房)’이다. 이는 하나의 아파트를 불법 증축해 다수의 좁은 원룸으로 쪼개 임대하는 방식이며, 타이베이에서는 이조차도 월세가 40만~50만 원에 달한다. 이는 청년의 월급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며, 저축은 고사하고 생활 유지조차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실제로 타이베이에서 아파트를 구입하려면 한 푼도 쓰지 않고 28년간 월급을 모아야 한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으며, 이는 젊은 세대에게 ‘미래를 설계한다’는 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대만 청년들은 자국을 ‘실리콘 아일랜드’ 대신 ‘귀도(고스트 아일랜드)’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는 곧 좌절과 분노의 집합적 표현이다.
대만의 저임금 문제는 단순히 산업 구조나 외부 경쟁 탓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면에는 정부 정책의 방향성과 기업 문화의 보수성, 약체 노조, 불투명한 경영 구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 성과가 국민 개개인에게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대만은 분명히 눈부신 기술 성장을 이뤘으며, 글로벌 산업의 중심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생활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임금, 과도한 주거 비용, 희망을 잃어버린 청년 세대가 존재한다. 이러한 불균형이 계속된다면, 대만의 경제 성장 신화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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