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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모저모

유럽에 소형차와 수동 변속기 차량이 많은 이유

by 밍떡자 2025. 5. 21.

유럽에서 차량을 빌릴 때,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불편 중 하나는 수동변속기 차량의 절대적인 비중이다. 특히 동급의 차량을 기준으로 할 때 자동변속기(오토매틱) 차량은 선택지가 제한적이며, 가격 또한 현저히 높게 책정되어 있다. 이는 대도시를 벗어난 중소도시나 지방에서는 더욱 두드러지며, 과거에는 아예 자동변속기 차량이 없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최근 들어 대형 차량을 중심으로 자동변속기의 보급이 확대되고 있으며, 독일과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오토차의 신차 판매량이 수동차를 넘어서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특히 2020년 영국의 신차 시장에서는 처음으로 오토차 판매 비율이 수동차를 앞질렀다. 그런데도, 소형차 중심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서는 여전히 수동변속기 차량이 일반적이며, 유럽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도로 위 차량의 60~70%가 수동차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세계의 오토매틱화와 한국의 특수성
이와 같은 현상은 오토매틱 차량이 주류를 이루는 국가들과는 현격히 다른 양상이다. 현재 오토차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는 국가는 미국, 일본,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그리고 대한민국 정도에 불과하다. 특히 한국의 경우 수동변속기를 다룰 수 있는 운전자가 급감한 탓에, 대리운전 호출 시 수동차는 추가 요금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중고차 시장에서도 수동차는 현저한 가치 하락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소수의 수동차 애호가들은 여전히 운전의 재미라는 가치를 이유로 수동차를 고집하고 있다.

유럽의 경제적 배경과 소형차 중심 구조
유럽의 수동차 선호는 단순한 취향이나 문화의 차이로 설명되기 어렵다. 이 현상은 1945년 이후 유럽 재건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당시 유럽 전역은 황폐해진 상태였고, 국가들은 모든 자원을 복구와 재건에 집중해야 했다. 이 시기, 개인 소비는 사치로 간주되었으며, 자동차 역시 생존과 실용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 결과, 당시 유럽 시장을 장악한 모델은 값싼 소형차들이었다. 예컨대 영국의 오스틴 1100과 같은 1100cc급 자동차가 대표적이다. 이는 미국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피해를 보지 않았던 미국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누렸으며, 도시와 인프라, 자동차까지도 대형화되었다. 쉐보레 임팔라와 같은 대형 세단이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로 부상한 배경이다.

도시 구조와 지형의 차이가 만든 운전 문화
유럽과 미국의 도시 구조 또한 자동차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럽의 도시들은 대부분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방어를 염두에 두고 언덕 위에 형성된 도시들이 많다.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하며, 경사도 가파른 편이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대형 차량이 불리할 수밖에 없으며, 기민한 가속과 제어가 가능한 소형 수동차가 적합한 선택지였다.
반면, 미국은 광활한 대륙 위에 계획적으로 도시를 건설한 국가이다. 넓고 반듯한 도로 구조는 큰 차를 몰고도 부담 없이 주행하거나 주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자동변속기의 도입과 보급을 촉진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에 이미 미국은 오토차 중심의 운전 문화를 완성했지만, 유럽은 수동변속기의 유리함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경제성과 효율성의 관성
유럽에서 수동차가 오랫동안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연료비 차이였다. 평균적으로 유럽의 휘발유 가격은 미국보다 두 배 이상 높았고, 이는 연비 효율을 자동차 구매 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었다. 수동차는 오토차에 비해 구조가 단순하고 차량 중량이 30% 가량 가벼워, 연비가 평균 20% 가량 더 높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오토매틱 차량의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며, 연비 차이는 거의 사라졌다. 특히 수동차는 운전자가 변속 타이밍을 적절히 맞추지 못할 경우, 오히려 연료 소모가 더 클 수 있다. 현재 수동차를 선호하는 경향은 본질적으로 과거 효율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관성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유지비, 정비성, 그리고 심리적 요인
자동차 유지비용 측면에서도 수동차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자동변속기에 비해 구조가 단순한 수동변속기는 고장이 적고 수리도 용이하며, 정비 비용이 적었다. 인건비가 높은 유럽에서, 복잡한 자동변속기 수리는 높은 비용을 수반했고, 이는 자동변속기를 회피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 외에도 일부 지역에서는 "자동차는 여성들이 운전하는 차"라는 사회적 편견이 존재하기도 하며,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사용해 차량을 제어하는 수동운전이 더 남성적인 방식으로 여겨지는 경향도 있었다. 여기에 디지털 기술에 대한 불신 역시 자동변속기의 대중화를 늦춘 요인으로 작용했다.

도시 집중화와 자동변속기의 확산
자동변속기가 빠르게 보급된 국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도시 집중화다. 대한민국, 일본, 미국은 복잡한 도심 내 교통 환경에서 운전하는 비율이 높다. 이로 인해 정체와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구간이 많고, 오토매틱의 편리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반면 유럽은 도시 간 분산 구조가 뚜렷하여 도심 정체의 강도가 비교적 낮았다. 만약 유럽 역시 한국처럼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되었다면, 오토차의 보급은 지금보다 훨씬 빨랐을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 사라지는 전통
최근에는 유럽에서도 점차 자동변속기의 비중이 늘고 있다. 고급 차 브랜드를 중심으로 수동변속기 단종이 잇따르고 있으며, 심지어 스포츠카 영역에서도 자동변속기만 탑재되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다. 향후 전기차, 수소차 시대가 본격화되면 수동변속기 자체가 기술적으로 불필요해질 전망이다.
수동차는 오랫동안 연비, 유지비, 도로 환경 등에서 강점을 보여주며 합리적 선택으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 발전과 편의성의 우위 속에서 그 존재 이유를 잊어가고 있다. 운전의 재미, 기계적 통제감 등은 일부 애호가들의 전유물로 남게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편리함이라는 인간 본성의 속성이, 수동변속기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