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유럽은 기후 재난이라 불릴 만한 혹독한 여름을 겪었다.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해 유럽 전역에서 무려 7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해마다 여름이 반복될 때마다 유사한 수준의 재난이 이어졌고, 특히 최근 몇 년은 기후 변화로 인해 그 빈도와 강도가 더욱 심화하는 추세다. 폭염은 이제 일시적인 이상 기후가 아니라, 유럽이 직면한 실질적인 생존 문제로 변모했다.
그런데도 유럽에서는 냉방 문화의 확산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에서 진행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성인 응답자의 3분의 2는 에어컨을 구입할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2022년, 유럽에서 가장 극심한 폭염 피해를 본 이탈리아조차도 전체 가정 중 단 7%만이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과 독일의 보급률은 각각 5%, 3%로 더 낮은 수준이다.
이는 단지 경제적 문제로 설명되기 어렵다. 유럽은 대체로 높은 수준의 생활 인프라와 구매력을 갖춘 지역이다. 그럼에도 에어컨이라는 기술 문명에 대해 유럽인들이 유보하는 태도를 보이는 데는, 문화적 가치관과 역사, 환경윤리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 깊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1. 기후적 요인
유럽에서 에어컨이 보편적이지 않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기후 때문이다. 한국처럼 30도를 넘는 폭염과 열대야가 일상화된 나라와 달리, 유럽의 여름은 상대적으로 온화한 편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의 7월 평균 기온은 25도에 불과하며, 습도 또한 낮아 그늘에만 들어가도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이 냉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가정은 물론이고, 식당이나 호텔조차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대중교통 수단도 대부분 냉방 설비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같은 기후는 더 이상 ‘항상 그랬던’ 자연의 상태로 남아 있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이상기후 현상이 점차 빈번해지면서, 유럽의 여름도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2022년, 독일 베를린은 사상 최고 기온인 38도를 기록했고, 영국 기상청은 앞으로 런던에서도 40도를 넘는 폭염이 반복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기후의 변화는 이제 유럽의 전통적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직접적인 도전을 가하고 있다.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던 냉방이, 이제는 생존의 수단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2. 역사적 요인
에어컨의 역사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20세기 초, 윌리엄 캐리어가 개발한 기계식 냉방 시스템은 산업화의 흐름을 타고 빠르게 확산되었다. 미국의 도시들은 이 시기 급격히 팽창 중이었고, 새로 지어지는 빌딩과 주택에는 자연스럽게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냉방 기술의 확산은 단순한 편의를 넘어 생명을 지키는 도구로도 작용했으며, 실제로 미국에서는 에어컨 보급 이후 온열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40% 이상 감소했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반면 유럽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유럽은 이미 도시화가 오래전에 이루어진 지역으로, 대부분의 도시는 수백 년 된 건물들로 가득했다. 이처럼 오래된 건축물에 냉방 설비를 추가하는 것은 구조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유럽의 기후는 에어컨 없이도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굳이 큰 비용을 들여 냉방 시설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3. 건축적 요소
유럽 주택은 두꺼운 석조 벽과 높은 층고를 특징으로 한다. 이는 원래 겨울철 단열과 보온에 최적화된 구조지만, 여름철에는 찬 공기를 가두는 데에도 유리하게 작용해 왔다. 새벽의 시원한 공기를 실내에 들인 뒤 문을 닫고 내부를 유지하는 방식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의 여름철 생존 전략이었다.
하지만 2003년, 기록적인 폭염은 이러한 전통적 방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두꺼운 돌벽은 오히려 햇볕에 달궈지며 실내 온도를 높였고, 냉방 없이 지내던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로 인한 사망자가 대규모로 발생하며 냉방 부재의 위험성이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4. 까다로운 규제
유럽에서는 오래된 건물일수록 보존과 관련된 규제가 더욱 엄격하다. 에어컨 설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임대인이 냉방 기기를 설치하려면 건물주의 동의만 아니라 관청의 허가도 받아야 하며, 이 과정은 몇 달씩 지연되기 일쑤다.
게다가 실외기 설치에도 여러 제약이 따른다. 많은 국가에서는 실외기가 옆집 창문에서 4미터 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고, 도시 미관을 해치지 않도록 외부 노출을 금지하는 지역도 있다.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유럽의 건물 구조를 감안하면, 이런 조건을 충족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에서는 스탠드형이나 시스템형 에어컨보다 간편하게 설치할 수 있는 이동식 에어컨이 주로 사용된다.
5. 비싼 전기요금
유럽에서 에어컨 사용이 제한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높은 전기요금이다. 청정에너지 확대 정책에 따라 태양광, 풍력 등 생산 단가가 높은 에너지원에 의존하면서, 유럽의 전기요금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독일은 미국의 약 3배, 유럽 평균도 미국의 2배에 달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국가는 시간대별 누진 요금을 적용해, 여름철 피크 시간대 냉방기 사용은 큰 부담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의 경우 난방기구에는 5%의 세금이 부과되지만, 냉방기구에는 무려 20%의 세금이 매겨질 정도로 정책적으로도 사용을 억제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에어컨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소비재로 남아 있다.
6. 시민들의 환경 의식
유럽에서 에어컨 사용이 더딘 또 다른 이유는 높은 환경 의식이다. 많은 유럽인은 탄소 배출과 온실가스 감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실천이 일상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국립 기상 연구센터는 에어컨 사용량이 두 배로 늘면 도심 기온이 2도 이상 상승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고, 이는 에어컨 사용에 대한 사회적 경계심을 더욱 키웠다. 에어컨은 단순한 개인 소비가 아니라, 기후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동안 유럽인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긴 여름휴가를 떠나거나, 한낮의 ‘시에스타(낮잠)’ 같은 문화로 대응해 왔다. 그러나 최근 폭염이 잦아지면서, 에어컨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이제 유럽 사회는 기후를 지키려는 신념과 생존을 위한 냉방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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