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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모저모

서양에 안주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

by 밍떡자 2025. 5. 9.

술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시대와 지역마다 다르다. 성경에서는 노아가 홍수 이후 포도나무를 심고 술을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로마 신화에서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인간에게 술을 전했다고 전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음의 신 오시리스가 술을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가설이 주목받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과일이 발효되는 현상을 통해 술이 처음 생겨났을 가능성이다. 대표적인 설은 원숭이 기원설이다. 열대우림의 움푹 팬 바위에 원숭이가 과일을 숨겨 두었고, 이 과일이 시간이 지나 자연 발효되면서 알코올이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인간이 이를 우연히 발견해 마셨고, 그 독특한 기분과 취기를 경험하면서 인류 최초의 술 문화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이처럼 술은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점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자연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후로 전 세계의 문화와 사회 속에서 술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이 보편성 속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호주의 애버리지니, 알래스카의 이누이트,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 원주민 사회에서는 술 문화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이는 이 지역들의 기후와 환경이 발효를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곡물이나 과일이 자연적으로 발효되기 위한 적정 온도와 습도가 충족되지 않으니, 술의 자연 발생 자체가 힘들었다.
술은 이처럼 인간과 함께해온 오랜 문화의 일부이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안주 문화’의 유무다. 동양, 특히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는 안주 없이 술을 마시는 문화는 상상조차 어렵다. 술과 음식은 불가분의 관계로 여겨지고, ‘술상’이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할 만큼 함께 차려내는 것이 기본이다. 반면, 서양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술은 술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음식을 곁들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술의 필수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동양에서 술이 음식이 된 이유
술은 원래 성스러운 음료였다. 동양에서는 신과 조상에게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의식이 발달하면서 술이 중요한 제물로 사용되었고, 제사가 끝난 후에는 제사 음식과 함께 술을 나누어 마시는 관습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술은 단순한 기호 음료가 아닌 공동의 음식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또한, 농경 사회의 특성도 술이 음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중요한 배경이다. 농사는 혼자보다 여럿이 힘을 모아야 효율이 높았기 때문에 집단 중심의 문화가 발달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술을 통한 유대와 결속으로 이어졌다. 술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관계를 맺는 도구가 되었고, 이로 인해 권주(勸酒), 대작(對酌) 등 술을 매개로 한 친교 문화가 깊게 자리 잡았다.
술자리는 점차 접대와 소속감을 확인하는 사회적 장치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음식을 곁들이는 안주 문화가 발달했다. 술기운을 누르기 위해 곁들인 음식이 ‘안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안주(按酒)’란, 술기운을 ‘누른다(按)’는 의미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많은 양의 술을 나눠 마시기 위한 문화적 배경 때문에 동양의 술은 대체로 도수가 낮고, 과일주나 곡물 발효주가 많다. 물론 중국처럼 고도주의 전통이 강한 지역도 있으나, 일반적인 경향은 약한 술에 있다.
또한, 동양에서의 술자리는 종종 비언어적인 메시지를 담은 사회적 신호로 기능한다. 어떤 조직에서 함께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며, 반대로 술자리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소속에서 밀려났다는 암시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직장 회식을 단순히 술을 마시는 자리로 치부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양에서 안주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안주’라는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런던이나 파리 등 대도시의 술집에서는 감자튀김, 견과류 같은 간단한 스낵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한국처럼 푸짐한 요리와 함께 술을 즐기는 문화는 흔치 않다. 서양에서 안주에 해당하는 단어는 ‘side dish’ 정도이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식사와 관련된 개념이지 술을 위한 음식은 아니다.
이 차이는 술의 인식과 기원에서 비롯된다. 동양에서는 술이 신에게 바치는 제물의 일부였고, 제사 이후 함께 나누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서양에서 술은 기호 식품이자 식수 대용 음료였다. 유럽에서는 수돗물을 틀면 석회질이 포함된 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물은 그냥 마시기 어려워 맥주나 와인과 같은 발효주가 식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즉, 서양에서 술은 물의 대체물이었으며, 본래 음식과 함께 소비되는 것이 전제였기 때문에 별도의 안주 문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서양에서도 위스키처럼 높은 도수 증류주가 발달하긴 했지만, 이는 동양처럼 집단적인 친교의 매개가 아닌 개인적인 음용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에 역사적 재난도 한몫했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사회 전반에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은 이를 막기 위해 술, 특히 증류주를 스스로 마시는 방식으로 대응하려 했다. 이로 인해 서양의 증류주는 점차 ‘혼자 마시는 술’로 자리 잡았고, 안주와는 더욱 멀어졌다.
현대에 이르러 서양에서 술은 향과 맛을 즐기는 기호 식품으로 정착되었고, 강한 증류주일수록 음식의 맛이 오히려 술의 풍미를 방해한다는 인식도 생겨났다. 유럽 술집에서 사람들이 간단한 잔을 들고 서서 술을 마시며 자유롭게 움직이는 모습은, 안주 없이도 가능한 개별적이고 비형식적인 술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